도서 <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 중
육아와 집안일은 가장 고귀한 노동이다
"내가 밖에 나가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데, 집에 와서 만큼은 좀 편안하게 쉬면 안 돼?"라고 아빠들은 말한다. 자기가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을 엄청난 태산을 지고 온 것처럼 군다. 남편이 이렇게 나오면 전업주부인 엄마들은 "내가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일은 가치가 없는 줄 알아?"라며 화를 낸다.
아빠들은 가끔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으스대고 , 엄마들은 별것 아닌 일을 한다고 평가 절하하지만 집안일은 생각보다 노동량이 많다.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에서는 2년 전 '전업주부의 연봉을 찾아라'라는 제목으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한 바 있다. 프로그램은 하루 동안 주부들이 하는 일을 40여 개의 항목으로 세세히 나누어서 각 노동시간을 계산하여 월급으로 환산한 것이다. 부모를 모시지 않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아이를 둔 30대 전업주부가 이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가사노동을 월급으로 환산해보면 약 430만 원이 넘는 돈이 추산된다. 아이가 1명 있는 전업주부도 가사노동의 가치가 월 300만 원이 넘게 평가되었다. 연봉으로 따지면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어떤 아빠들은 이 결과를 보고 집에서 놀면서 하는 일에 너무 후한 가치를 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캐나다의 경우 전업주부의 연봉을 1억 2000만 원, 미국의 경우 1억 1000만 원, 영국의 경우 5500만 원으로 보고 있다. 외국의 어느 나라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가장 고귀한 노동이다"라는 말이 헌법의 첫 조항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육아나 가사노동을 평가 절하해 왔다. 솔직히 이러한 인식은 아빠들보다 엄마들 자신이 더 심했다. 전업주부로 있는 것보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가치를 비교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어쭙잖게 벌면서 아이들이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아이를 맡기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고 돈을 벌었는데 따져보니 지출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물론 사회적 활동이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그것을 경제적인 잣대로 환산해서 자꾸 비교하려고 든다. 사실 육아나 가사노동은 감히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일은 인간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게 해주는 근본과 같은 일이다.
엄마들의 불안은 오래된 본능이다
내아이에게 일어난 단 하나의 문제지만 엄마들의 머릿속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제가 이어지고, 걱정부터 생겨난다. 엄마들의 이런 불안해하는 심리의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이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의 불안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불안은 생존에 위협이 발생하면 이를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반응으로 우리 몸에서 일련의 변화를 일으킨다. 예르 들어 원시인류가 숲을 지나는데 등 뒤에서 뭔가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고 하자 위험이 느껴지면 온몸의 기관에 경고 신호가 보내진다. 부신피질에서 아드레날린, 노르아드레날린 등이 신체의 각 부위에 강력한 경고신호를 보내는데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압도 올라간다. 지금의 불안한 상황을 대처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극대화시키고 다른 기능은 잠시 감소시킨다.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팔 근육으로 혈액의 공급이 늘어나고 급하게 달아나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리 근육으로도 혈액이 다량 공급된다. 호흡도 점차 빨라지는데 이는 근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다. 눈의 동공은 도망갈 장소나 혹은 공격할 위치를 찾기 위해 최대한 커지다. 이런 불안에 대한 몸의 반응으로 인해 인류는 무서운 맹수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자신이 존중받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당영하다고 느끼는 것은 오랜 세월 그런 사회문화적인 가치관이 반복되면서 유전자 깊숙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성인인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자식을 위한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엄마들에게 아이는 내가 보살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이 지켜내야 할 고결한 조재이자 혼의 경정체이다. 나는 못생기고 못 배우고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존귀한 존재인 아이가 나의 몸을 빌려서 태어남으로써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희생적인 어머니는 존경을 받는다' 는 생각은 관습이 되어 다른 나라에 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효부상이 만들어지고 열녀비가 세워졌다. '장한 어머니상'은 그야말로 자식이 출세하면 주는 상이다. 훌륭한 자식이 나로기까지 희생한 어머니에게 주는 상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어머니의 희생적인 역할을 이렇게까지 강조하면서 상을 주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 엄마들, 최근 들어 왜 더욱 불안할까?
우리나라 엄마들이라고해도 요즘 엄마들과 옛날 엄마들의 불안은 참 많이 다르다.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당연히 여기는 것이야 워낙 여자라는 유전자, 한국 여인이라는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 엄마와 요즘 엄마들의 걱정거리를 나열해보면 차원이 다르다. 내가 '옛날 엄마'라고 칭하는 세대는 지금의 50-60세까지다.